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던 초창기 시절 나는 샤론 와인버그라는 사장이 지휘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깨어있는 경영자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어느 눈 내리는 날, 나는 불안정한 사용자 데모 프로그램을 손보기 위해 아픈데도 불구하고 회사에 나왔다. 샤론은 내 사무실에 들어와서 내가 탁자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나갔다가 몇 분 후에 스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그것을 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내가 바쁜 관리자 업무를 하면서 어떻게 이럴 시간을 다 냈느냐고 묻자, 그녀는 예의 그 유명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마을에 ‘모두everybody‘와 ‘누군가somebody‘, ‘아무나anybody‘ 그리고 ‘아무도nobody‘라는 네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겼다. ‘모두’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일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누군가’가 매우 화를 냈다. 왜냐하면 그건 ‘모두’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최초의 펭귄’을 만들어라. 전 직원을 대상으로 쓰지 말고 선택된 몇 사람에게 은밀하게 써라. 전 직원을 상대로 연설하지 말고 몇 사람만 불러서 조용히 얘기하라. 특별히 선정된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물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면 주저하던 펭귄 모두 일제히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바람이 성긴 대나무에 불어와 소리를 내다가도 바람이 지나가면 대는 그 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고, 기러기가 쓸쓸한 못을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못에는 그림자가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이 닥치면 마음이 그제서야 나타나고, 그 일이 지나가면 마음도 따라서 비게 된다. – 홍자성, 채근담 #82
Coffee Break. 연말을 맞이하는 지금, 저녁 무렵 서재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봅니다.
마음속으로, 올 한해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쁜 일과 고마운 이들에 대한 감사함을 생각하지만, 가끔은 답답하고 속상한 일, 누군가에 대한 한없이 섭섭한 생각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마음을 상하게 하고는 합니다.
이럴 때, 저는 서재 안 상자에 보관해 두었던 편지들을 꺼내어 읽어보고는 합니다. 이제는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연필로 써 내려간 편지글을 읽다보면, 편지 글귀 사이로 떠오르는 옛제자들과의 추억들로 마음 한켠에서 시작된 따뜻함이 서재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해 한해 늘 다짐과 후회들을 반복하는 삶이지만,
원망과 시기가 아닌 서로의 건승을 기원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대밭에서 서너 발 되는 장대를 베어다 앞마당에 빨랫대로 걸어 두었다. 헛간에서 헌 판자를 주워다가 또닥또닥 손논림 끝에 한 자 높이의 보조 경상도 하나 만들었다.
방 안 벽에 대못을 두 개 박아 가사와 장삼을 걸고, 반쯤 꽃이 핀 동백꽃 가지를 꺾어다 백자 지통에 꽂아 놓으니 휑하던 방 안에 금세 봄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임제 선사의 어록 중에서 좋아하는 한 구절 ‘즉시현금 갱무시절’이라고 쓴 족자를 걸어 놓으니 낯설기만 하던 방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
우리가 사는 것은 지금 이 여기다.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을 자기 자신답게 최선을 기울여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어느덧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었다. 개와 마지막으로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주인이 돌아오면 내가 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보살펴줄것이었다.
내가 떠난 다음 날인가, 후배 부부는 돌아왔고 며칠 후,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개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개가 말 잘 들었지요? “ “그럼, 너무 착해서 아무 문제 없었어.” “근데 선배가고 돌아와 보니 마루에다 먹은 걸 토해놨더라구요. 챙겨준 사료는 건드리지도 않았구요.” “아니, 왜? 나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선배 여기 올때 큰 여행가방 가지고 왔을 거 아니에요? 떠날 때는 큰 여행가방 들고 나가셨을 거구요. 개가 여행가방에 민감해요. 정들었는데 떠나는 걸 알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나봐요.”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돌아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느라 한 번도 뒷일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별이 아팠구나. 미안하다. 나, 이토록 텁텁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하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음식에다 감정을 담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는 사람, 이렇게 모른 척 뻣뻣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스티브 잡스가 아프다는 소식이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당분간 맥월드 오프닝에서 그의 멋진 프리젠테이션을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한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프리젠테이션은 사실 오랜 기간동안의 연습과 노력에 기인한 당연한 산물인지도 모른다.
프리젠터가 무대에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화면에 뿌려지는 영상까지도 초단위로 계산하고, 상품이 명확하게 시각화될 수 있도록 몇 시간을 상품을 향한 조명각도를 조절해가며 무대를 만들어갔던 잡스의 노력들을 우리는 단순히 한 개인의 천재성이라는 표현으로만 숨겨온 것은 아닐까-
학생들 앞에서 교사는 모델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또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교사는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하고, 그에 맞추어 많은 시간을 리허설을 하여 강단에 서야 한다고 배웠다.
충분한 사전연습 후에 좋은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현실의 벽과 시간이 가져다 주는 나태함은 치명적이다. 날마다 늘어가는 교무입학업무에 치이다 보면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나. 언제까지 끝없이 퍼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때문에 마음이 아픈 적도 있다.
한양대 권성호 교수님의 저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무지개를 생각하며, 너무나 멋진 쌍무지개를 그리며 힘을 낸다.”
힘이 들고 지칠 때는 그냥 쉬어보자. 아둥바둥하다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문장들 속에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 기대가 깨졌을 때 찾아올 아쉬움과 절망감 또한 담겨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기다리는 고도(GODOH)는 1막과 2막이 끝나도록 오지 않는다. 고도가 올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나 하듯 쉼없이 이어지는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엉뚱하기도 하고, 단절된 대화이기도 하고, 철학적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무거운 주제인 경우도 있다.
기다리는 이가 느끼는 불안감, 공포심, 낭패감, 허무감, 상실감, 지루함, 애절함, 흥분과 기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베케트는 어떤 설명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고도가 누구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도대체 고도는 누구란 말인가-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독자는 두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그들의 기다림의 목적은 무엇일까?
고도를 만나면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일까 –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 수많은 화두를 던져주고는 독자에게 답은 각자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읽을수록, 다시 생각해 볼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책이다.
– 2009.01.31. – 서울시교원연수원에서. – 인중.
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드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드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1952년 프랑스어판으로 첫 출간된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h)’는 사뮈엘 베케트에게 1969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수여하게 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