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인용]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꺾일 때는 중독된 사람이 약물 기운에 떨어졌을 때 겪는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에의 열망은 더 강화될 뿐이다. 김희진이 도착하던 날, 그녀의 피곤에 지쳐 눈 감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란 것에 감염됐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생동안 나를 지배하리라는 것도. 나는 막연한 희망에 대한 막무가내의 기대로 김희진을 돌보았다.’
스티브 잡스가 아프다는 소식이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당분간 맥월드 오프닝에서 그의 멋진 프리젠테이션을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한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프리젠테이션은 사실 오랜 기간동안의 연습과 노력에 기인한 당연한 산물인지도 모른다.
프리젠터가 무대에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화면에 뿌려지는 영상까지도 초단위로 계산하고, 상품이 명확하게 시각화될 수 있도록 몇 시간을 상품을 향한 조명각도를 조절해가며 무대를 만들어갔던 잡스의 노력들을 우리는 단순히 한 개인의 천재성이라는 표현으로만 숨겨온 것은 아닐까-
학생들 앞에서 교사는 모델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또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교사는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하고, 그에 맞추어 많은 시간을 리허설을 하여 강단에 서야 한다고 배웠다.
충분한 사전연습 후에 좋은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현실의 벽과 시간이 가져다 주는 나태함은 치명적이다. 날마다 늘어가는 교무입학업무에 치이다 보면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나. 언제까지 끝없이 퍼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때문에 마음이 아픈 적도 있다.
한양대 권성호 교수님의 저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무지개를 생각하며, 너무나 멋진 쌍무지개를 그리며 힘을 낸다.”
힘이 들고 지칠 때는 그냥 쉬어보자. 아둥바둥하다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문장들 속에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 기대가 깨졌을 때 찾아올 아쉬움과 절망감 또한 담겨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기다리는 고도(GODOH)는 1막과 2막이 끝나도록 오지 않는다. 고도가 올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나 하듯 쉼없이 이어지는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엉뚱하기도 하고, 단절된 대화이기도 하고, 철학적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무거운 주제인 경우도 있다.
기다리는 이가 느끼는 불안감, 공포심, 낭패감, 허무감, 상실감, 지루함, 애절함, 흥분과 기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베케트는 어떤 설명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고도가 누구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도대체 고도는 누구란 말인가-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독자는 두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그들의 기다림의 목적은 무엇일까?
고도를 만나면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일까 –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 수많은 화두를 던져주고는 독자에게 답은 각자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읽을수록, 다시 생각해 볼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책이다.
– 2009.01.31. – 서울시교원연수원에서. – 인중.
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드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드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1952년 프랑스어판으로 첫 출간된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h)’는 사뮈엘 베케트에게 1969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수여하게 한 책이다.